불교란 무엇인가 ?
에 대하여 다시금 정리를 해 볼까 합니다.
사무실 개소식에 시간이 짧았으며. 바쁜 일정에 오시지 못한
분이 많았습니다. 또한 회원전원이 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소인의 견해가 참고 된다면 행불에 많은도움이 되리라는 확신에
의해서입니다.
주제 : 불교는 무엇인가?
설명:
불교의 진리는 말과 글을 이용하여 전달하고져 하면
이미 진리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지혜에
의지해야 함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서로의 공유를 위하여 희미하게나마 그 명색을
더듬어 보는것에 불과 하므로. 그렇게 필요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시작해보겠습니다.
불교를 우리는 佛敎(불교) 라 표기합니다.
佛 을 자해 해 봅니다.
사람 人변 + 아닐 弗 字 를 씁니다.
사람이 아닌 것을 불 字 로 직역해 볼 수 있겠지요.
그리고 敎는 배울 교 字입니다.
그렇다면 불교란 사람이 아닌것을 배운다 라고
역시 직역이 가능해 집니다.
이것을 바르게 우리의 실제적인 언어의 활용성으로
가까이 접근해 봅시다.
“사람만이 배우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어떠한 타 종교라도 모두가 사람만을 위한 종교이지만
불교는 사람만이 배우는 것이 아니다 라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불교에 귀의하는 자는 사람만이 아닌
모든 중생들이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대체 이게 무슨말인가?
좀 황당하지 않습니까?
이 맥락은 불교를 수행하는 자 들은 사람들이 하는 말 과
생각으로만 이루어지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한단말인가? 라는 명제를
요구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그배경을 살펴볼까 합니다.
왜 사람만이 믿는 종교가 불교가 아닌가?
佛 의 자해 즉 회의문자로서 의미를
구성한 것은 불견(不見)입니다.
중국 한자 어를 연구해보거나 서적을
찾아보면 당연한 해석이며 표현입니다.
결국 佛 이란 사람눈으로 사물을 보는것은 물론 사람눈으로
보이지 않는것도 세상에 주어져 있기 때문에(예를 들어 공간.
투명한 성품) 보이지 못한것도 배우는 것이 불교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이는 사물과 물체와 보이지 않는 공간의 모습까지 포함
하여 배워야 하기 때문에 사람만을 위한 불교가 아니라다는 정의
가 가능해 집니다.
자! 이렇게 보면
불교란 사람만이 아닌 사람으로는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묶어 보게 하므로서 삼라만상 및 우주의 공간
까지 포함한 삼천만대천세계를 전부 알고자 배우는 종교를 불교라
합니다.
부처님 이신 석가세존께서는 태어나실 조짐을 느낀 마야부인의
꿈속에서 하늘나라에 계시는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사천왕, 전
륜성왕. 등 많은 하늘인 들이 내려와 마야부인을 시립하였습니
다.그리고 석가모니 세존이 되시기 전 싯달타 태자로 계실 때
생노병사 를 해결하기 위하여 출가를 결심했지만 머뭇거릴때 였
습니다.
왕이신 아버지와 가족 그리고 아는 이들의 만류에 마음을
잡고 있지 못할 때.
또 다시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사천왕 등 많은 하늘인들이
내려와 출가를 종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출가하시어 설산수행 6년의 고통이 끝날즈음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여명이 시작되는 새벽녘에 반짝거리는 금성을 보고 천지
가 열리고 깨닫는 성불 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깨닫는 중에 많은 시험을 하는 무리들이있었습니다.
이 역시 하늘의 마왕들이 자기의 존재에 대하여 위협을
느낀 나머지 깨달음을 방해하는 하늘인들의 존재였습니다.
이러한 마귀의 존재들은 병속에 다 넣어버리는 원력을
보이시고 항복을 받습니다.
법을 깨치신 후 석가세존께서는 이러한 진리를 사실적으로 관
하신뒤 이러한 말씀을 하십니다.
"어찌 이 큰 깨달음을 중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너무나 어렵다!"
"그냥 열반으로 향하여 나 스스로만 완성으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며 중생을 제도하기위한 것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이 역시 팔상록에 나옵니다.
그러자 또 다시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미륵보살 .도리천 신하.
도솔천 내원궁 사천왕 들이 다시 내려와 부처님이 되신 석가세존
을 시립 하시고 예를 올린뒤 주어진 태생은 이미 약속한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중생의 제도를 위한것이 아닌가를 되 물으며 중생에게
법을 설 하실것을 호소하게 됩니다.
이에 생각을 고치시고 중생의 제도로 나가셨는데 간단하게
두가지로 진리를 설파하신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집멸도 사성제>와
이 우주를 포함한 만상의 공간에는 <삼십삼천 이라는
33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사천왕인 천인 들과 그리고 내가 걷고있는 인간세계와
싸움을 즐기는 아수라와 집착과 원한. 그리고 욕심에
의하여 형체없이 떠 돌아다니는 아귀 귀신과. 기어다니고
걸어다니고 날아다니는 등 의 형체 있는 축생들과.
이마져 벗어나 지옥에 있는 중생 등 여섯세계를 육도세계라
하는데.
이 중에서 인간과 하늘나라사람(천인) 은
교화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나 처럼 성불 할 수 있는 불성의 인
연이 있으므로 우선 이들을 위하여 제도를 하여야 겠다고 결심을
하시고. 그리고 나머지 4 계의 세계인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의
세계에 있는 자를 구원 할 수 있는 원력심을 인간과 하늘인에게 부
촉을 하여야 겠다고 생각 하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석가세존께서는 이 공간에 있는 33천세계를 열어 보이시
고 인간과 천인을 상대로 우선 중생의 제도를 힘쓴것이 49년간의 설
법이셨습니다.
당시에 부처님이 탄생하실 즈음 전후로 하늘나라에서
태로 잉태된 석가세존의 보조인으로 사리자와 목련존자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고 많은 선인과 부라만중에 우수한 지혜를 가진 사
람들을 포용하며 중생의 제도를 나선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법을 설 하실 때에는 항상 하늘사람과 . 하늘
사람 태생으로 인간이 된 사람들과. 우바새 우바이(청신남 청신녀)
인간들이 함께 설법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실례를 들어보아도 불교는 인간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고
우리눈으로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하늘나라 사람들과 삼십삼천
세계를 모두 보거나 지향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연결고리를 제시 한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또 부처님의 법이 쇠퇴한 후 28 대 제자인 인도왕국의
태자인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과 한국의 불교가 그 정통성을 잃
지 않는 인연의 배경이 또 있습니다.
제가 천자문을 소개 하는 것은 이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자는 위대한 우리민족이 창제한 글입니다.
역사속에 사라지고 상실된 원인에 대하여 고심초사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원인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弗 자 의 토대는 弓입니다.
이 弓 은 활궁자로 활 을 말하며. 우리나라
근본글자입니다.
조문할 때 조의 를 쓸때 弓 에다 弔 로(조문 조) 씁니다.
조상이 되는 하늘로 가는 뚫을 丨 하나가 추가
되는 글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나라를 일겉은 중국인이
표시한 동이족인 한국을 무엇으로 표현하고
있는가 하며는 弓 字 에다 큰 大 를 붙여 夷
字 가 됩니다.
활을쏘는 큰 민족을 夷 로 표시하며.
중국은 우리나라를 경계하고자 오랑캐
夷 라고 말 합니다.
그러나 사실적인 글자 자해는 위대한민족으
로 하늘보다 더 큰 활을가진 민족이다 라고
직역할 수 있는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마가 동쪽으로 온 이유는
한국의 불교태동과 진정한 성불인이
나오며 세계를 위한 교화의 국가로서
진정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인과응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자! 이 정도라 불교란 무엇인가를 알아 보았고
이러한 글을 인연하여 보게 된 도반인들은 우리나라의 위대한
정신체계를 인정한 달마를 위시한 부처님과 인연을 가진것에 대
하여 광영이 아닐 수 없음을 자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는 많은 종교가 모여들고 있으며 크게
부흥하고 있는 것도 이를 반증하는 실례가 됩니다.
어느나라이던간에 자기나라 종교만 고집하게 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러하지 않습니다.
끈질기게 외세의 침략에 거의 1000번이나 막아내였던 강함과
지혜로서 우리나라를 조상들께서 지켜내셨지만
종교에 대하여는 그 길을 터 놓고 있는 마음의 본성이 착한지라
포용심이 살아있음을 아셔야겠습니다.
자 여기서 다음번에는 부처님의 진리 말씀이신 사성제 를
소개 해 볼까 합니다.
인생의 고통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아무리 떡벌어진 권세와 재물을 가지고 었어도
고통을 느끼게 되어있습니다.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성공을 한 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의 인내와 끈기. 자제심을 수반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룰수 없습니다.
그러니 고 요.
생노병사 로서 우리는 태어나면 죽어야 한다는 단발마의
인생이므로 이 역시 고통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이는 울기부터 하는것이 그것이요
자라나며 성숙되어 가는 과정에 차별된 문화적 복지적 의미로서
차별화 되는 아픔이 고통 그것이요
좀 살만하면 병이 들어 고통이며
죽음으로서 애착하고 사랑한 가족과 아는 이를 두고 홀로
북망산천에 가야함이 그 고통이란 것을 말 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 만나야 하고 좋은 사람과 떨어져 살아야 하고
짝사랑해서 고통이요 배반당해 고통이요 배반해서 고통이고
사랑하는 사람 죽은 술픔이 고통입니다.
웬만하게 잘 살다가 아버지가 죽으면 다시 가세가 몰락하고
못살면서 열심히 살아 성공을 했다 해도 그 동안 서운해진
사람과 가까이 할 수 없고 돈 때문에 우정도 망설이게 되고
하물며 같이 살아가는 아내 역시 자기마음대로 되지 않아
고통이 되곤 합니다.
이러한 苦 의 본질을 벗어난 인생은 어느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이것이 苦 요
苦 는 어디에서 오는가?
집착에서 옵니다.
集입니다. 먹고 살아라지 돈 모아야 한다는 것이 集 이요
너가 나를 배반해? 하면서 지난시간에 잊지못할 상처를 안고 늘
분 해 하는 마음이 集 이며
무엇을 이루겠다고 늘 그 마음을 이루는데 매달리면 集 이고.
먹지않으면 안되므로 주변의 먹을것을 잡든지 키우든지 하여 입에
먹을것이 들어가야 사는것도 集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의 원인은 집착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멸하는 길 이 있으니 이를 깨처라 하시는
것이 멸도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고 집 멸 도 사성제입니다.
이 소식하나를 해결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세계백과 대사전에 불교에 대하여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불교는 생과 사의 경계가 모호하고 너무 광대하므로 미신시
하는 단점이 있다 라고 주장하였고
삶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삶과 거리가 있는게 단점이라
지적한 것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주장하는가?
그것은 몰라서 그런것입니다.
인간이란 경험하지 않은것 통계수치에서 발전한 사상적 주류에 갇혀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공간해석이 이루어지지 않게되면 편협하고 좁은
소견으로 발전하는 양상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이 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고집멸도"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는 스스로의 깨달음에 달려있습니다.
이를 필요충분조건이 아니지만 수학적 도해로 표현해보려 합니다.
(보기)
丨y(공간) 丨
丨 아미타세계(극락)
丨
丨(도솔천부터 27천세계_6천(육도)세계
丨
丨
丨도솔천
丨천인(하늘사람,신장)
丨지상(인간,아수라,아귀,축생)
丨---------------------------------------------x(시간)
丨지금이순간 전생 과거 과거 과거
땅 (지옥)
해석:
세로로 표시한 라인은 공간이라 설정하고 y축으로하고
가로로 표시한 라인은 시간이라 성정하고 x축으로합시다
x측의 길이에서 시간 때는 맨 처음 발생한 과거의 시간을
지구의 발생 연대인 46억년으로 설정해봅시다.
그러면 오늘날 서기 2013년까지 전부가 과거라는 시간에 속합니다.
이 과거시간 은 사라졌거나 이미 지나갔기에 우리는
다시 이 시간을 찾아갈수도 가볼 수 도 없는 영역
입니다.
이 과거의 시간대는 지구의 완전한 형태를 갖게 되는
과정이 필요 했을 것이고.
물이 생기고 불이 생기며 흙이 생기고 쇠 가 생기고 흙이 생기고
비로서 나무가 생겼고 화생하면 습으로 생긴 것 부터 알로 생기거나
탯줄로 생기거나 그냥 공기의 환경에 의하여 생겨 나는 생명이 시작
되었습니다.
이 오랜과정에서 포유루 파충류 등이 생기면서 공룡
등 큰 짐승들이 생겨나고 진화를 거듭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환경이 변모하며 다시 진화하여 짐승의 모습이 환경에
맞게끔 진화하고 그 중에서 원인류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씨족, 부족 국가 라는 의미로 진전이 있는 문명과 문화가
세습 발전하게 되고. 통치자가 나오고 백성이 나오면서 서로를 위
하여 사회를 구성하게 됩니다.
그 과거라는 영역속에는 석가도 탄생하고 예수도 탄생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죽어가게 됩니다.
우리나 저역시 그러한 과거의 영역에 어떠한 흔적으로
남아 있으면서 영원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화하고 다시 소멸하고 공간에 유하
다가 인연이 닿으면 다시 이렇게 저렇게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을 윤회라 합니다..
윤회란 둥그렇게 돌아가는 시작과 끝이없는 모습을 하면서
계속 반복적으로 돌아오는 생태현상을 "윤회"라 합니다.그런데
이 윤회는 항상 원인에 의한 결과의 발생이란 법칙이 있습니다.
사물의 이치에서 논 할 때 어떠한 문제점은 분명하게 원인이 있다.
이 원인에서 결과가 발생한 과정을 찾으면 문제를 해결 하게 된다.
이것이 논리의 법칙이며 이성적 관찰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그 순간 순간마다 주어진게 있습니다.
그 시간대에 그 공간이 주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 2600년전의 공간에는 석가가 계셨으며
과거 2012년전에 공간에는 예수가 계셨으며
과거 그 당시에는 우리라는 질료도 어떠한 모습인지는 모르지만
33천세계 의 어느부류 로 존재하고 있거나 때로는 소멸하여 보이지
않은 상태로(인간을기 준) 있다가 다시 태어났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러한 과거의 연속점이 "순간순간" 이어지며 그 순간만에 공간에
조성된 모든 변하지 않는 생명이 보호 유지 보존 하기 위하여 이렇
게 저렇게 변모하면서 현재 이 순간의 공간을 만나게 됩니다.
이 공간인 현재 이순간에 속한 33천의 세계는
이 동시적인 공간에 모두 다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46억년전의 지구발생과 태양발생을 기준하여
(더 먼 과거의 수십억겁이 있지만) 주어진 생명들 모든 것들은 현재
이순간의 공간에 모두 다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원리가 주어져야 이
치가 성립됩니다.
왜냐하면 불성이란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모두 영원히 살아가려는
의지를 본질로 하는 개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기적 생명체로서 오늘 이순간의 삶을 지키려는 의지가 주어진.
영원한 불성을 담보로 한 물자체의 본성에 의해 보존되는 질료는 변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현재 이순간 예수도 나와 함께 있고 석가도 나와 함께 있고
여러 생명들도 소급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모두가 이 순간에 나와 함
께 있다는 것을 말하고져 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부류의 삶을 지속하는 대상들을 모두 알게끔. 아니
면 서로가 통하는 교류는 인간만이 알고있는 언어나 말로서는 소통할
수 가 없는 자리입니다.
사천왕 과 우리가 말로서 통합니까?
아미타불 과 극락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동시 이공간에
있지만 말이 통합니까?
편지가 통합니까?
살아다니는 바람의 소리를 우리가 우리의 생각으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며 서로 말이 통하겠습니까?
강아지 와 내가 말이 통합니까?
단지 눈치로 마음으로 서로 통하는 무엇이 있어
집안에서도 삶을 살아가지만 말로서는 아니됩니다.
이러한 만상의 삼천만대천세계
(삼천만의 종류가 다시 대천세계 즉 태양계 의 수억개가 있는
우주세계를 포함) 의 종류들이 서로 말이 통하는가를 상상해보면
말이 서로 전혀 통하지 않고 살아가는 마음의 세계는 전부 그 주파
수가 다른 것입니다.
경허스님께 제자가 묻습니다.
"스님 모든 삼라만상이 모두 불성이 있다면.
개 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뜰 앞에 잦나무니라”
벌써 말에 걸려 전부를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이므로
말 안되는 말을 던져 주는것입니다.
오로지 전부를 이해하거나 하는것을 볼 수 밖에는 없는것이며.
그것도 가시적이며 제한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불성들인 삼천만대천세계의 존재들이 공유하는 무엇으로
접근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경허스님께서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의미를 개연하고 숙지한다고 하더라도
황당한 논리가 아닙니까?
당장 먹고 살기가 바쁜데 그거 언제 배우는가?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방편설을 하셨습니다.
아미타경을 독송하라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하라.
불경을 공부하라 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경모두는 방편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49년간 설법을 했어도 내가 한 말은 하나도 없다."
말로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므로 마하가섭에게 이심전심을 법 으로 전해 준 것이지요.
그러면 이 동시적인 공간에 순간적이 시간인 찰나를 어떻게
모든 것을 볼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이치로 말하면 간단합니다.
"공간"이 정지해 있고
"시간"이 정지해 있으면 좀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이놈의 시간이란 것은 찰라 찰라 자꾸 지나가므로
이 순간의 공간을 잡을 수 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금강경을 설 하실 때
과거의 마음을(당시의 생각) 확 잡아낼수가 없고
현재의 마음을 확 잡아 가둘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역시 확 잡아 낼 수 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거는 이미 소멸했으므로 없다 (용수보살)
현재 이순간의 마음은 자꾸 지나가며 변하므로 잡을 수 없다.
미래 역시 와야 하므로 잡을 수 가 없으며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용수보살)
그러나 과거란 그 흔적이 지금 이순간에 소급하여 이렇게
저렇게 변화하고 소멸한 듯 하지만 지금의 이순간에 인과로서
발생되어 결과인 현재 나타나 있으므로(보이거나 보이지않거나)
소멸한 것도 아니다.
현재 이순간 역시 지금 있으니까 소멸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있으므로 잡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미래 역시 아직오지 않았지만 영원한 불성으로 지금 이순간이
소급되어 같이 주어지기 때문에 오지 않을것도 아니다.
라고 또 다시 말씀하십니다 (용수보살)
자!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이 삼라만상의 동시적 공간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과
이 삼라만상의 세월을느끼게 하는 시간 역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태양이 뜨고 지고 하면 하루가 갑니다.
하루를 자면 식목이 자라고 아이들이 커 가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이 가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태양은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해가 진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해가 뜬다고 다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지구가 뺑뺑 돌기 때문에 해가 사라지고 나타나는 것인 줄
알지만 태양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또한 그 태양이 있는 공간 역시 항상 그 자리에 동시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물론 팽창을 하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공간은 공간일 뿐 이고
팽창만큼 생겨나는 것이 있으며 그만큼 주어져 보았자
공간 뿐! 입니다.
어떠한 질료인 (불성)이 화 하여 변화를 하는 것에 타고 가지만
그 질료는 변하지 않는 그 사실이 존재합니다.
물리법칙인 질량의 불변법칙과 유사합니다.
우리는 시간이란 것이 모두 흘러감으로서 소멸된다는
변화의 상태를 이해하는것은 맞지만 질료가 변하거나
소멸한다는 이치는 맞지 않는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시간이 정지된 개념"과
우리는 이처럼 "공간이 동시적으로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동시적인 공간에 존재하는 삼십삼천 세계를
공유하는 마음은 (인간으로서는 생각에 타고있음)
거리개념이 없습니다.
생각에 태양을 가고 동시적으로 달을 가는 상상을 하면
우리의 생각이 가듯이 아미타불에 놀러가서 고스톱 한번
치고 온다해도 가는 거리는 시간 개념이 없이 동시적인
그런 위대한 불성이 있다는 것을 말 합니다.
다만 우리는 욕심과 번뇌와 탐진치로 구성된 몸에 갇혀
있다는 인식선상에서 굳어진 업장이 있을 뿐 입니다.
그러므로 삼십삼천의 세계에 거주하시는 만상의 부처님
세계에는 각기 마음의 주파수는 다르지만 (욕심에 가려져)
서로가 통하는 주파수를 찾으면 모두가 이웃이요, 하나가 되는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서 안되며 생각으로서는 아니되는
마음의 본질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이 고와 집인 4 성제중 2성제가 생기는 중생들의 현주소는
과거가 소급하여 현실 이순간의 공간에 다 있는데
그 과거에 미련을 두고 과거를 기반하여 거기에 쫒아다니므로
고통이 따르고 집착이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가 이미 지금 이 현주소에 와 있으므로
과거에 매달릴 이유가 전혀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현실에 집중하는사고방식이 주어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과거에 집착하면
이미 고스톱판에 따따블 피박쓰는 상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고통이고 이 고통은 집착에서 생긴다고 말 합니다.
고통은 이미 고통이 아니다.
이미 지나간 것에 연유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인생의 고통은 이미 인정하자
그러면 고생만 하면 잘 살 수 있다 라는 의식의 개혁이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복록을 받습니다.
이치가 그럴 수 밖에는 없습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면 과거의 모든 일과 흔적은 소멸되므로
당시의 죄 와 나쁜것은 소멸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만! 현실에 충실하면 그 자리에 서 잘 하면 될 뿐입니다.
이 자리를 "참회"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를 "회개"라 합니다.
그러면 지금을 잘 하고 삼십삼천 모두의 협조를 바라고
서로 교류를 한다면 자기는 좀더 좋은 생활을 영위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이요.
측은지심으로 삼십삼천에 사는 분들의 하나같은 마음입니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자리 이를 "해인삼매"라 는 것이고
"무상정득정각" 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심" 이 됩니다.
이를 "화엄세계"라 하여 "화엄경"을 이름하고
이러한 화엄으로 보현되어 나타나는 것을 "법화경"이라하며
이러한 하나로 연결된 것을 알리는 주파수가 "염불"입니다.
나 하나의 생각보다
나와 연결된 신장과 하늘인 들이 모두 내게 협조를 해준다면
이미 자신의 지혜는 더 커지며 세상의 모든 것을 헤처나가는데
도움이 됩니다.
단지 우리들은 각기 소급된 과거의 흔적이 다르므로
서로의 생각과 경험이 축적된 정서가 다릅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자 말자 일곱걸음 걸어간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 함인가?
공지영 작가의 "무소의 뿔로 혼자 가라"는 책 이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각기 무의의 차별로 존재 하고 있습니다.
나와 대상은 각기 생각이 달라져야 하고 동일한 습관을
가질수 없으면서 하나입니다.
우리들의 인생은 막막한 대해에 배하나 띄우고 항해하는 것입니다.
마누라가 이쁘다고 마누라 배 와 나의 배 를 묶어서 갈 수 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누라 배 역시 주어진 환경이 파도의 부위가 다르고
바람에 의한 항해 키질을 달리해야 하고 돗대를 다는 방향이
다를 수 밖에는 없습니다.
어찌 사랑하는 아내라 하여 자기배에 그 배를 단단히 묶을 수
있습니까?
그 배는 균형점이 달라 서로 침몰 될 위험이 있음니다.
그러므로 묶어놓은 밧줄을 서로 분리되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도록 짤라야 합니다.
조금 멀리서 유도하고 합의하고 이럴때 이렇다 라는 믿음으로
항해 할 뿐이지 내 마음대로 아내가 되어지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혼자 항해하라". 이것이 "무쇠의뿔로 혼자 가라"는
부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자식이나 친구나 아는이나 모두가 일정한 간격으로 서로
홀로가 되 서로가 도움이 되는 "원래 하나"라고 하는 진리를
알고 가는 행위. 이를 "인생의 척도"라 합니다.
모든 만상의 이치가 그러합니다.
항상 관세음 명호를 부르면 관세음 보살을 보게되고
나무아미타경을 독송하면 극락에 간다는 것은
우리들의 위대한 원력으로 이루어지는 확실한 과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과거에 소급한 경험과 환경이 다른 상황에서
지금을 유지하므로 서로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존중 할 뿐 이지요.
항해 하다가 파도가 이는것은 내 마음에 불이 많아 열정이
심한것이요. 너무 침울하면 물기만 있고 마음이 차거워
열정이 너무없는 정체된 상태를 말 하는것입니다.
이 우주의 동시적인 공간요소를 유지하고 인생을 개진하는것은
수,화,목,금,토. 다섯가지 "여래장"을 적절하게 운용하고
분배하며 자기의 성찰을 위해 부처님의 설법대로 이행하는
것이 바로메타가 되는 것입니다.
"미래"란 것은 항상 내가 움직이지 않는 이 순간의 공간에
집중하면 미래라는 놈이 오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움직일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미래로 향하려고 하고
과거로 쫒아가려고 하면 이미 자기는 시간속에 갇히고
생노병사에 걸리는 중생이 되면
탐진치의 비중에 따라 다시금 이렇게 저렇게 태어나는
연속선상에서 지금 이순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위대한 정신"입니다.
"공간"을 이 순간 잡고
"시간"에 속지않고 변하지 않는 지금 이순간을 놓치지
않으면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하는 "색즉시공의 반야"를
보는 것이고 "금강경"을 보는 것이고
이 모든 현상의 "인과응보를 알게 되면 법화경"이며
만상의 차별적인 "무위의 현상이 화엄세계"가 됩니다.
하늘인과 인간들을 위하여 이러한 법을 설하신
석가세존께 귀의합니다.
도반님들의 행불을 발원합니다. -관법-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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